필이 꽂힌 詩

그 사람을 가졌는가-함석헌

펜아우라 2009. 4. 20. 16:01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함 석 헌 (1901~1989) 


<내식대로 해석>

대학 새내기 때던가. "문학합네" 하며 깝신거리다 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이 시를 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용택 도종환 이해인 류시화 류의 사랑시에 익숙해 있던 내게 둔탁한 둔기의 충격으로 와닿던 시가 이 시다. 곧바로 개인홈페이지에 올리고 지금처럼 나름 주석 비슷한 걸 달며 애송시 파일에 넣었다. 

과연 씨알사상을 설파했던 철학자 함석헌 답다는 느낌이 송곳의 뾰족함으로 전해오는 시다. 시라기 보다는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의 색깔이 묻어나는 잠언 같은 글. 어떤 엄숙함과 비장미마저 흘러 흡사 3.1절 독립선언서의 무게로 와 닿는다.  이 시는 이후 한 여인을 유혹하는 무기로 제법 효력을 발휘하며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생사의 갈림길 같은 극적인 순간이 아니어도 "온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사람을 갖는다는 건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억지스런 바람이자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 시를 또다시 꺼내 읽으며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누구나 찾고있는 '그사람' 말고, 정작 난 그 누군가가 찾고있는 '그사람' 인가에 의문부호를 찍어본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이후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달라진 시의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