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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맛집에 '맛집'이 병들어 간다
펜아우라
2010. 2. 4. 11:37
TV 맛집에 '맛집'이 병들어 간다
[OSEN=손남원의 연예산책] 서울 마포 용문동의 한 허름한 국숫집. 가파른 언덕길 초입의 2평 남짓 가건물에 간판조차 없어서 마치 조그만 포장마차를 연상케하는 곳이다.
이 국숫집의 단골은 인근 공장지대 근로자와 동네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메뉴라고는 잔치국수와 비빔국수, 달랑 두 개뿐. 가격도 보통이나 곱배기 모두 3000원으로 똑같지만 양만큼은 큰 사발 하나에 넘칠 정도로 담아내는 푸짐한 인심이다.
그러나 TV 맛 프로에 소개되고 몇몇 신문이 뒤따라 이 곳을 잔치국수 명가로 보도하면서 사정은 180도 달라졌다. 먼저 할머니 인상이 뒤틀리는 중이다. 손님이 늘었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지 말랬더니 내가지고 힘들어 죽겠다"는 푸념을 연신 뱉고 있다.
이 곳을 찾던 단골들은 더이상 제 시간에 3000원 짜리 푸짐한 국수로 허기를 면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에서 이 집을 찾아냈다'고 히히덕 거리며 할머니에게 주차할 곳을 묻는 모피 코트 아줌마들.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서 아이들을 데리고 온 중년 부모와 국수 한 그릇 시켜놓고 둘이 나눠먹으며 마냥 행복한 연인. 카메라와 노트북으로 중무장한 전문 식객(?)들이 줄서고 꽉 들어찬 국숫집은 더이상 서민의 공간으로 자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이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어렵게 받아든 할머니의 국수는 면발이 불고 국물은 식어서 예전 맛이 아니었다. 주문 후 몇 분이면 뚝딱 차려지던 국수를 20분 넘게 기다려서 겨우 받아든 것이나 문 밖에 줄지어 선 대기자들 눈총에 후다닥 그 큰 그릇을 비우는 조급함도 그렇고.
무엇보다 적당히 벌어 적당히 베풀자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정겹던 미소가 사라진 게 아쉽다. "생각보다 맛이 없다" "TV에 소개된 맛집이 그렇지 뭐"라는 낯선 이들의 수군거림에 상처받을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3000원 잔치국수가 맛 있으면 얼마나 맛 있을까. 배고픔이 가장 맛있는 반찬이라지 않았던가. 할머니의 국수는 주머니 가벼운 동네 공장 직원들과 어르신들의 주린 배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그 맛이 일품이었던 게다. 전국 최고 수준의 잔치국수를 판다는 소개 기사가 이같은 속사정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한 탓에 일부러 먼 곳에서 왔다는 식객들이 괜한 불평을 텋어놓아 할머니를 골탕먹이는 것이다.
TV 속 맛집 소개는 2000년대 들어 열풍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역기능 보다 순기능이 강조됐고 많은 시청자들에게 좋은 맛집 정보를 알렸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맛 소개 프로그램이 급증하고 더이상 발굴할 맛집 자원이 고갈되면서 음식점 광고를 방불케하는 전파 낭비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할머니의 잔치국숫집처럼, 오붓한 분위기의 동네 맛집들이 TV에 소개되면서 제 모습을 잃어가는 부작용들도 곧잘 눈에 띄는 중이다. 요즘 TV 맛집 소개는 중용의 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엔터테인먼트팀 부장]mcgwire@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