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 설
오 탁 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이 시에 대한 내 느낌
이 시는 시인 겸 소설가 오탁번 님이 2006년 낸 시집 <손님>에 들어 있는 시중 한 편이다. 남도 어느 곳일까? 땅 끝쪽이라 했으니 해남이나 강진, 진도, 목포 무안 이런 곳쯤 아닐까?! 전라도 특유의 질펀한 육두문자 사투리가 나오는 걸 보면 필경 그 지역이 틀림 없으리라. 이 시는 처음 접하는 순간 단박에 한 호흡으로 읽히는 마력을 지닌 시다.
김유정의 소설 <봄봄>에서나 느낄법한 유쾌한 해학과 적절한 에로티시즘이 발견된다. 삼동에도 눈이 내리지 않을만큼 따똣한 남도의 한 마을에, 느닷없는 눈 세례에 이토록 진한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네 이장의 모습이 한편의 단막극처럼 눈에 선하게 오버랩된다. 글로 쓴 시지만 마치 그림처럼, 영상처럼 회화성이라는 생명력을 부여받자 이런 명품 시로 거듭난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듯" "우주의 미아가 된듯 울부짖었다" 같은 감칠맛 나는 표현에서 시를 읽는 재미는 배가 된다. 소탈하다 못해 투박하기 그지 없는 촌 무지렁이 민초들의 질팍한 삶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시라 더 정이 가고 내 살 같이 살갑다.
어젯밤 올해 유난히 눈이 잦다보니 이 시가 살포시 생각났다. 퇴근길 서점에 들러 이 시집을 찾아봐야겠다. 뜬금없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도 다시 읽고 싶어진다. 아 시 한편이, 소설 한편이 지친 현대인의 삶에 오아시스가 된다는 완고한 진리앞에 고개 숙인다. 인문학의 위대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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