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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화방사에서 떨어진 꽃잎의 처연함을 보다~

나들이 갈까? 여행갈까?

by 펜아우라 2011. 6. 1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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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에 위치한 망운산에는 화방사라는 천년의 숨결을 간직한 사찰이 있다.

그 기원이 신라 신문왕으로 거슬러오르니 전국 어느 절 못지않은 고찰중 하나다.

보리암 용문사와 더불어 남해 3대사찰로도 불리우고 있다.

 

남해여행 초입에 만난 작고 고즈넉한 절로, 남해 여행 첫 관문에 깊은 정감을 주었던 곳.

우리 부부가 신혼여행 국내판으로 정한 곳이 경남 남해였는데, 서울에서 차 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5시간여 내달려 남해대교를 건너 도착한 첫 여행지였다.

 

이곳에 가기 전 태국 푸켓의 와찰롱 사원인가 먼가 하는 곳을 둘러보고 실망했던 터라

짐짓 우리나라 특유의 사찰에서 받는 느낌이 그리웠었다.

그래서일까 천년의 향기를 간직한 이곳의 익숙한 풍경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입구, 경내 작은 돌다리 위에 수줍은듯 떨어진 이름 모를 꽃잎 하나...

멀리서 한달음에 내달려온 나그네의 가뿐 숨을 차분하게

다독여 준다...이것이 생명을 다하고 떨어진 꽃의 힘인가...!!

 

 

화방사 대웅전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 거쳐야 할 문...

'망운산화방사'라는 현판의 역동적인 붓글씨와 이끼 낀 돌계단의 수수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세속에 찌든(?) 우리부부는 잠시라도 그 때를 씻고져 경건한 마음으로

가지런히 두 손 모아 경내로 들어선다...못내 부처의 자비를 구하며.

 

 

 

 

차라리 본연의 모습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전국 어느 사찰을 가나 마주칠 수 있는 왜곡된 佛心의 발현은 이렇게 가는 곳마다

대 역사役事의 모습으로 나그네의 눈을 휘둥그레지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평범함보다 못한 불편한 마주침이다.

 

도심에서 지친 사람들은 차라리 작고 보잘것 없는 암자와 억겁의 묵은 때가 쌓인 부처상과

이끼 낀 암자의 약천수에서 더 큰 평안과 기쁨을 발견할진데...

개발의 광풍은 사찰에서도 예외 없이 그 기세를 뻗치고 있다...

 

이날 알고 있으나 도리 없이 마주쳐야 했던 화방사 안에서의 유일한 불편함이었다.

 

 

떨어진 꽃들의 처연함은 사찰을 뒤로하고 떠나는 나그네의 발길을 애처롭게 붙잡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다음을 기약하는 작은 밀약 으로 아쉬운 눈길을 보내고 돌아섰다.

 

잠시 저 아무렇지 않게 후다닥 떨어진 꽃들에게서 또 무언가 답을 얻으려 했던 우리 부부.

알듯모를듯 인생의 정답 같은 걸구하려 한 것이 곧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이었음을 알아챈 건

그나마

화방사에서 얻은 큰 깨달음이었지도 모른다...그렇게 화방사에서의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tip) 남해 화방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재위:681∼692년)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연죽사(煙竹寺)라 불렀고, 고려 중기 혜심(慧諶:1178∼1234)이 중창한 뒤에는 영장사(靈藏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근거지로 쓰이다가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36년(인조 14)에 계원(戒元)과 영철(靈哲)이 현위치로 옮기면서 절 이름을 화방사라 하였다. 영조·정조 때 가직(嘉直)이 머무르면서 절을 중수한 이후 용문사(龍門寺)·보리암(菩提庵)과 함께 남해군의 3대 사찰이 되었다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응진전·명부전·칠성각·일주문·채진루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과 마주보고 있는 채진루(採眞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은 본래 보광전이었으나 보광전이 1981년 10월 1일 불에 타 사라지자 1984년 12월 29일 복원하면서 전각 이름을 바꾼 것이다. 산내 암자로 망운암이 있다.

유물로는 옥종자(玉宗子)·금고(金鼓)·이충무공비문목판(李忠武公碑文木版) 등이 유명하다. 이 중 옥종자는 절을 짓고 불상을 모실 때 밝혔던 등잔으로 한번 불을 붙이면 꺼트려서도 안되고, 일단 꺼진 뒤에는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다고 전한다. 1234년(고려 고종21) 이전에 불을 붙였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꺼졌다. 이런 까닭에 다시 불을 붙이지 못하여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금고는 조선 중기 때의 유물로 범자(梵字)가 사방에 양각되어 있으며, 이충무공비문목판에는 모두 2천자가 새겨져 있다. 이밖에 〈현판기문〉 〈완문절목〉〈선생안〉 등의 고문서가 전한다.[출처] 화방사 [花芳寺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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